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산이야기,변해명

다정도병 2011. 1. 6. 11:31

덕유산 휴양림은 잣나무 숲이었다.

잣나무도 전나무나 낙엽송처럼 미끈하게 자라 오를 수 있나 싶어 넋을 잃고 바라본다.

하늘을 향해 유감 없이 뻗어 오른 잣나무가 동화 속의 왕자처럼 가슴 설레게 하는 모습이다.


잘 생긴 나무들이다.

그 숲 속 잡목들 사이에 오래 만에 낯익은 풀들이 반가움으로 와락 달려든다.

산 속을 놀이터 삼아 뛰놀던 어린 시절 숲의 정경이 훤히 다가온다. 


생강나무, 산뽕나무, 물푸레나무, 층층나무, 산딸나무......

그 아래는 싸리나무, 멍석딸기, 산딸기넝쿨, 국수나무등

그리고 그 아래는 취며 으아리며 앵초, 비비추, 원추리, 금낭화, 매발톱, 산괴불주머니,

고사리, 고비, 미나리아재비과의 풀들, 패랭이들..... .

그리고 땅 갈피에 질경이며 빨갛게 혀를 내미는 뱀딸기. 등

익숙하게 바라보던 잡목과 풀들이 오래 만에 나와 악수를 한다.

이런 숲에 든 것이 얼마 만인가?너무 즐거워 내 목소리는 물기를 머금고 높아진다. 


나는 일행들과 멀찍히 떨어져 혼자 숲 속을 거닌다.

몰래 감추어둔 연인을 만나는 기분이다.

산비둘기 소리에 따라 울던 언년이.

지집 죽고, 자식 죽고, 큰아기는 밥 달라고, 작은 아기는 젖 달라고, 헌 누더기 이는 물고........

그렇게 운다며 서럽게 따라 울던 아이다.

그때처럼 산비둘기가 청승맞게 운다.  


겨울 눈이 채 녹기도 전에 노란 꽃을 피우며 봄을 불러들이던 개동백나무가 잡목 속에서 고개를 내민다.

원래 이름은 생강나무인데, 강원도와 경기도 일원에서는 개동백나무라고 부른다.

그 동백나무 열매로 기름을 짜서 머리에 바르고 곱게 쪽을 찌던 여인들,

그래서 아낙네들에게는 동백기름이 없어서는 안될 화장품에 하나였다.

머리에 기름이 배어 머리를 빗을 때마다 얼레빗에 머리 때가 묻어나도 동백기름을 바르고 또 발랐다.

앞가르마를 곧게 타고 곱게 빗어 넘긴 머리로 야무지게 댕기 들여 쪽을 찌고,

그 머리 위에 똬리를 얹고 물동이 이고 동네 우물가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 모습은

마치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누구에겐가 보여주고 싶어 물동이를 이고 오가는것 같았다.

 

17살에 새댁이 된 이쁜이는 참 예뻤다.

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물동이를 한 손으로 잡고,

또 한 손으로는 흘러내리는 물을 훔치면서 가만가만 가는 모습은

바라만 보아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.

 

항라적삼 안깃 속에/ 연적 같은 저 젖 보소/

담배 씨만큼만 보고 가소/ 더 보면은 병납니더.//


옛 시조의 한 대목처럼 두 팔을 들어올린 겨드랑이 사이로 속살이 살짝 비친다.

나는 지금도 그때 이쁜이 머리에서 풍기던 동백기름 냄새와 물동이를 인 뒷모습을 기억한다.


산초나무가 가시로 내 소매를 잡는다.

산초나무도 가을이면 까만 들깨보다 조금 큰 열매가 수십 알씩 한 떨기로 모여 흑진주처럼 반짝이는데

그 산초알로 기름을 짜서 먹기도 하고 머릿기름으로 썼다.

산초 향은 동백기름 향보다 더 강했다.

절간에서는 그 열매로 장아찌를 담가 먹기도 한다는데

그 향이 너무 짙어서 익숙하지 않으면 먹지 못한다.

시집갈 처녀들이 즐겨 열매를 따던 나무다.

이모는 산초기름을 발랐다 그 향기가 지금도 코끝을 간질이는 것 같다.

꽃은 지고 열매는 아직 달지 않은 산초나무 모습이다. .   


물푸레나무가 가냘픈 팔을 길게 뻗어 올리고

기지개도 할 수 없는 자리에서 발돋움을 하고 얼굴을 내민다.

언제나 가늘고 휘청거리고 부러질 듯 의지하려는 모습이다.


그런 모습이 도리어 도리깨 아들로 쓰인다.

물푸레작대기라는 말이 있듯 얼마나 단단하고 질긴지 아무리 두들겨도 부러지지 않는다.


도리깨 아들은 삼형제다.

2m 쯤의 길이의 물푸레작대기 세 개를 부챗살처럼 엮어

도리깨 꼭지 끝에 매달아 빙글빙글 돌게 하고

도리깨 아들을 매단 긴 작대기를 잡고 휘둘러 내리치면 마당에 펴놓은 곡식이삭이 알곡으로 털린다.

그런 농기구인 도리깨는 물푸레나무가 아니면 만들지 못한다.

숲 속에서 늘 가냘프고 길게 뻗어 올라 빈약해 보이는 대도

어느 나무도 흉내낼 수 없는 질긴 체질을 지녔다.       

망종을 넘기고 보리 가을이 되면 집집마다 보리를 터는 도리깨질 소리가 들렸다.

두 사람이 마주 보며 장단을 맞춰 도리깨질을 하기도 하고 세 사람이 장단을 맞추기도했다.

이제는 어느농촌에서도 도리깨소리가 들리지않으리라. 

 

길가에 취나물잎을 뜯어 씹어본다.

향긋한 향기가 입안에 가득 고여난다.

우리가 요즘 사먹는 취나물에서는 맡을 수 없는 향이다.

으아리가 꽃봉오리를 달고 곁에 있는 풀을 의지하고 넝쿨처럼 순을 내밀고 기대고 있다.

으아리는 그 맛이 아려서 그냥 씹지 못해도 나물로 먹었다.

넝쿨 따라 하얀 꽃이 피어오르는 것이 고운 으아리다.

그늘지고 습기가 많은 곳에 모여 자라는 앵초, 솜나물이라고 했다.

분홍 꽃이 앙증맞은 꽃이다.

솜이불을 덮고 있는 것 같은 따뜻한 느낌의 잎이다.

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막 피어나는 금낭화, 금낭화를 보면 밥풀꽃도 생각이 난다.

아홉도 넘는 동생을 남겨두고 배고파 굶어죽은 누나의 넋이 피어난 아픈 전설의 꽃이다.

패랭이, 붓꽃, 원추리꽃, 산괴불주머니, 초롱꽃, 둥굴레, 제비꽃, 할미꽃, 매발톱꽃 등

산야의 꽃들이 지천으로 고개를 들고 다가선다.

꽃이 지기도 하고 막 피워나기도 하고 꽃 없이 잎으로만 인사하는 풀들도 많다.


나는 고향의 소꿉친구 이름을 떠올리듯

기억 저편에 가 있는 풀이름을 기억해 보며 모처럼 숲의 친구가 되어본다. 


밤에는 별 비가 숲에 내려 달맞이꽃이 꽃말처럼 <말없는 사랑>으로 피어나더니

아침에는 안개 이불 속에서 할미꽃이 <슬픈 추억>으로 고개를 숙이고 피었다.

 

그런데, 이상한 것이 이 숲에서 아무리 귀기울여도 소쩍새나 뻐꾸기, 꾀꼬리 울음이 들리지 않는다.

고작 산비둘기 소리뿐. 물소리가 없는 숲에서는 새들도 노래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. 


그래도 덕유산 휴양림은 살아있는 고향의 어머니다.

오랜만에 안겨 보는 숲 속에서의 평화,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눞듯 산을 베고 눕는다.    
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2004. 한국수필   변해명